[성씨기행] 전남 영암군 “천안 전씨” 입향조를 찾아서

천안전씨는 단일 계통 백제계 향토 성씨
46세손 전승문·전승무 형제…영암 서호 엄길마을 입향
고려태조 전락 삼사좌복야 추증…전이갑·전의갑 형제 삼충공
전몽성 형제들의 충효정신

전영태 | 입력 : 2025/03/11 [01:28]

[영암군민일보/전영태 기자] 천안전씨는 충청남도 천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천안 전씨(天安全氏)의 시조는 백제 개국공신인 전섭(全)이다. 전섭의 29세손인 전락을 천안전씨의 중시조로 하고 천안을 본관으로 후손들이 세거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천안 전씨 계파는 ▲판결사공파, ▲대제학공파, ▲삼재공파, ▲두평군파, ▲문효공파 총 5개파가 있다.

 

▲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

◆ 천안전씨는 단일 계통 백제계 향토 성씨

천안전씨는 단일 계통 백제계 향토 성씨다. 기록에 의하면 전씨가 백제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이 고증된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역사 사료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에 위치한 비암사에서 발견된 금석문인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 새겨진 명문에는 국왕과 대신 7세 부모를 비롯한 모든 중생을 위해 예를 갖추어 절을 짓고 아미타 불상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계유년(673년)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비암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 46세손 전승문·전승무 형제…영암 서호 엄길마을 입향

천안 전씨는 조선 시대 영암 지역의 유력한 세거 사족으로, 1504년(연산군 10) 전승문, 전승무 형제가 강진군 퇴동 마을에서 서호면 엄길마을에 입향한 이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입향조 전승문의 맏아들인 전윤은 흥양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충순위사정과 첨지 중추부사를 역임한 전방필의 네 아들 전몽일, 전몽성, 전몽진, 전몽태는 무인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쳤다.

 

특히 전몽성은 1583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고경명 아래에서 금산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함평 현감을 지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전몽진, 김덕흡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하던 중 영암 해암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숙종 때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영암의 장동사(長洞祠)에 아우 전몽진과 함께 배향되어 영암 출신의 충신으로 손꼽히고 있다.

 

◆ 고려태조 전락 삼사좌복야 추증전이갑·전의갑 형제 삼충공

전섭의 29세손인 전락은 천안전씨의 중시조로 고려 태조 왕건 927년 후백제와의 대구 공산 동수(지금의 팔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왕건을 구하고 신숭겸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는 공들의 충절을 높이 평가 전락은 충달공 삼사좌복야에 추증하였고,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함께 삼충공이라 불렸다.

 

또한, 전락은 천안 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천안을 본관으로 세거를 이어가고 있으며, 37세손인 전려(시호는 강숙공)는 고려 충렬왕 때 정당문학, 대제학을 역임하고 두평군에 책봉됐다. 그가 전라남도(강진군 작천)에 입향해 천안전씨 두평군파의 문을 열었다.

 

전려의 손자인 39세손 전문식(?~?, 자는 문영, 호는 도은, 시호는 문평)은 1367년 성균관을 창설 정몽주를 국자좨주로 삼고, 1371년에 문과에 급제 정당문학, 대사간 및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 후 형부상서사, 평안백이 되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길에 고려의 멸망과 조선 개국 소식을 듣고 은거해 두문불출했다. 태조 이성계의 여러 차례 출사 권유를 거절하다가 정종의 간곡한 청으로 잠시 경상백을 지냈으며, 그후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다 생을 마친 후, 전북 진안 영산사에 배향됐다. 

 

46세손 전승문(1484~?, 호는 길촌)은 연산군 치세에 향촌에 은둔한 처사로서 동생 전승무와 함께 영암 서호 엄길마을에 입향 영암 천안전씨의 세거을 이어가고 있다.

 

▲ 영암 전씨충효문 전남기념물 제71호


◆ 전몽성 형제들의 충효정신

전남도 영암군 서호면 은적산 자락 엄길마을 앞에 있는 장동사에(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몽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우(祀宇)가 있다. 현제는 전몽진과 전몽태 3형제가 배향되었다.

 

49세손 전몽성(1561~1597)은 무과 급제하고 선전관, 군기사주부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병장 휘하에서 금산전투에 참전하고 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부대의 선전관으로 의주행재소로부터 한양까지 어가를 호위했으며 함평 현감을 역임했다. 이후 낙향해 어머니 봉양에 힘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동생 전몽진, 김덕흡, 유장춘 등과 함께 의병 창의해 영암 해암포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지자 ‘신하의 도리’를 외치며 적진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전몽진(1565~1597)은 같은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동생 전몽태(1571~?)는 전란 중 형제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신 효자로서 무과 급제하고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던 창성방어사 김완 장군과 함께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록에 올랐다. 형제의 충절과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는 전씨충효문(전라남도 기념물 제71호)을 내리고 영암 장동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에 배향했다.

 

▲ 장동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


후손들은 하절기에는 수래정에서, 동절기에는 원경재에서 학당을 열어 교육하면서 미풍양속을 가꾸는 데 앞장섰다. 종가는 800년 된 느티나무처럼 넓은 그늘을 만들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교지·문집 등 고문서와 충효문정려, 수래정, 장동사, 원경재 등 유산을 보존하고 선조의 얼을 계승하는 데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

위키백과

나무위키

진안문화원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상생방송STB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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