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전라도를 구한”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양달사 장군의 충효일체(忠孝一體)
|
![]() ▲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암읍 동무리 5거리 장독골샘 옆에 1971년 3월 김기회 영암군수가 비문을 지어 공적비를 세웠다. |
◆ 양달사 장군의 충효일체(忠孝一體)
양 장군은 1518년 2월 2일, 전라도 영암 도포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과 담력이 남달랐던 그는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고 열심히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여 19세인 중종 32년(1537년)에 급제하였다. 10여 년 후인 명종 1년(1546년) 11월 10일 중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전라좌우 우후와 진해현감 등을 지냈다. 공직에 몸담을 때는 항상 청렴하고 근검하였으며, 집에서는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다.
양 장군은 해남현감을 지내다가 1555년(명종 10) 어머니 청주 한 씨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를 위해 낙향했다.
시묘살이를 하던 양 장군은 왜구의 침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사촌 동생인 부제학 양서정에게 연통. 양서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이거늘 어찌 가만히 있으시렵니까?”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에 충(忠)과 효(孝)의 갈림길에서 그는 ‘충’을 택했다.
“상복을 입고 있는 몸으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비록 효도의 예는 아니지만 왜적 때문에 임금을 돌보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여지도서’ 중에서)
◆ 양달사 장군 조선 시대 첫 의병 출전
양 장군은 곧바로 형 양달수, 동생 양달해, 양달초와 함께 의병을 모집해서 영암읍으로 진격하였다.
이 당시는 왜구가 남해안에서 기승을 부리던 때이다. 1555년 5월에 왜구가 70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량진(達梁鎭)[지금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쳐들어왔다.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 ▲ 영암읍 동무리 5거리에 있는 장독골샘, 을묘왜변 때 양달사 장군이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고 해서 장독골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읍내 많은 주민들은 이곳 샘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
영암성 밖엔 왜구가 진을 치고 있고, 사흘간의 격전 끝에 영암성은 수천 명에 달하는 왜구에게 포위되고, 군량미마저 떨어졌다. 마실 물도 없었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진 상태였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이한 사건을 포함한다.‘장독골샘’ 전설 또한 기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달사 장군은 장독『군인들의 기 중 장군 표지기』을 높이 들고 한 번 호령을 한 뒤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깃발을 꽂은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사들은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해소했고 사기가 충천하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부터 이 샘을 장독골샘이라 불렀다. 장독골샘은 장독샘 또는 장군정으로도 불린다. (영암의 전설 ‘양달사와 장독골샘’전설 중 일부)
![]() ▲ 양사준이 지은 "정왜대첩"은 을묘왜변(1555년) 당시 영암성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노래한 시다. 전쟁시 「정왜대첩」은 가사작품 「남정가」와 함께 을묘왜변 당시에 지은 작품이다. |
◆ 조선왕조실록의 칠언절구
상중 출전하였다는 이유로 영암성 전투에서의 모든 공을 도순찰사 이준경, 전주부윤 이윤경 등에게 돌리다 보니 양달사 장군에게는 아무런 포상이 없었고, 장흥부의 원벽에 양달사에게 포상이 없음을 개탄하는 시가 나붙었다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남아 있다.
장수들을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칠언절구가 실려 있는데, 그 시엔 을묘왜변 때 전쟁에 임하던 장수들의 문제점을 일일이 거론하고 있다. 원수 역할을 맡았던 전라도순찰사 이준경을 향해서는 “원수는 금성(나주)에서 부질없이 물러나 움츠렸다”라고 말할 정도로 민심은 좋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의 칠언절구.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 有功達泗歸何處
의리 없는 유충정이 강진에 부임했 / 無義忠貞任康津
평소 국록을 먹을 때 모두 거짓을 꾸미네 / 食祿平時皆飾僞
오늘날 위기를 당하니 문득 실상이 드러나네 / 臨危此日却見眞
멋대로 날뛰는 왜적을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 橫行倭賊誰能敵
공사간에 모두 불태워 없애니 삶은 힘들고 / 焚蕩公私困生民
상벌은 법이 없어 공도가 무너지니 / 賞罰無章公道滅
실망하여 탄식하는 임금의 수치는 씻을 길 없네 / 惆悵君羞雪無因
조선왕조실록은 이 시에 주를 달면서 양달사를 딱 한 번 거론한다. “양달사는 영암을 지킨 공이 있는데 발탁하지 않았다(梁達泗 有靈岩之功 而不爲擢用)”는 13자의 기록이다.
이후 호남 유생들이 양달사의 포상을 지속적으로 건의 292년이 지난 이후 헌종 13년(1847년)에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양달사는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